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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인장)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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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장의 유래, 국새와 옥새
작성자 베베플러스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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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178

인장의 유래

 

오늘날 우리들은 印章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印章이 인간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
인류는 예로부터 현재에까지 변함없이 사용해온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장이다.
고대(古代)로부터 내려온 印章의 성격을 보면 신앙(信仰)의 대상으로서의 印章 古代에 있어서의 印章은 신성한 영물(靈物)이었다. 주술적(呪術的)인 혹은 호부(護符)로서의 印章이 인류 最古의 도시문명(都市文明)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에서 紀元前 4000年頃에 이르러 이미 사용된 흔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돌이나 조개껍질 따위를 이용해서 문자(文字) 나 문양(紋樣)을 각(刻)한 스템프식 印章이나 원통형의 印章이 당시 상류계급이었던 슈멜人에겐 장신구(裝身具)의 구실을 함과 동시에 호신(護身)의 부적(符籍)으로 생각되었다.
이집트에는 기원전(紀元前) 2000년경부터 황금충의 형상을 본뜬 스카라브 (Scarab)라는 석인(石印)이 있었는데 그것은 회문자(繪文字) 또는 王名, 人名 때로는 제신(諸神) 이나 성수(聖獸)의 모습을 음각(陰刻)하였던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황금충을 케베리라고 호칭하여 창조(創造)의 神, 태양(太陽)의 神으로 숭배했던 것이므로, 스카라브는 귀신을 쫓는 호부(護符)로서 인체(人體)에 간직되었으며, 인재(印材)로는 활석질(滑石質)을 사용(使用)하였지만 금은(金銀)으로 된 것은 흉장(胸章)이나 지환(指環)으로도 사용하는 풍습이 그리스나 로마시대(時代)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紀元前 1600年頃에 에게文明의 中心이었던 지중해(地中海)의 크레타 島에서는 상형문자(象形文字, 크레타文字)를 새긴 印章이 사용되었다.
  中國에서는 紀元前 1000年頃 후반, 전국시대 (戰國時代)에서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걸쳐 성행했던 印章에 금수(禽獸)나 인물(人物)을 새긴 스키타이식의 초생인(肖生印)이 많았으며, 특히 신상(神像)을 각(刻)한 것에서 주술적(呪術的) 종교적(宗敎的) 성격을 보는 것이다.
한인(漢印)으로는 고어인(古語印)의 일종(一種)인 황신월장(黃神越章)이라는 印章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이 산중(山中)에서 패용(佩用)하면 호환(虎患)이나 악신(惡神)의 화(禍)를 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 印章에 대한 영적(靈的) 숭앙(崇仰)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國王이 바뀔 때마다 王이 명당(明堂)에 앉아 국새(國璽)를 손수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곧 국새(國璽)가 왕권(王權)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사직(社稷)-왕조의 주권 나아가서는 國家社會]의 안태(安泰)를 빌었다는 기원적(祈願的)인 의미(意味)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이미 국새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인장에도 용봉(龍鳳)을 아로새겼다던가 청자(靑瓷)를 구워 인형(印形)을 만들었다가 하는 것은 印章에 대한 예술적(藝術的)인 감정(感情)만을 의미(意味)하 는 것이 아니다. 인장예술에 있어 인장이 인간(人間)에게 주는 영적(靈的) 감정의 표상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감정은 근세(近世)의 이조시대(李朝時代)까지 면면이 이어져 이조(李朝) 왕실(王室) 에서는 보인소(寶印所)라는 관청을 두어 이에 종일품(從一品)이라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두어 이를 관장케 하였으며 현존(現存)하는 국새(國璽)와 보인(寶印)이 1000개를 넘는 것을 볼 때에, 이는 인장 이라는 것이 단순한 필요성(必要性) 이상의 기원적(祈願的)인 존재였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이며 최근세(最近世)에 와서는 고종황후(高宗皇后) 민비(閔妃)가 일인(日人)에게 시해(弑害) 되었을 무렵, 민비(閔妃)의 명복을 빌어 고황후보(高皇后寶)라는 것을 조각하였다는 사실(事實)이 뚜렷하게 이를 증명 (證明)하고 있다.
 
     
 
  
국새와 옥새 
 

    [국새와 옥새는 같은 것일까?]
요즘은 국새라는 용어가 일반화됐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옥새라는 용어가 친숙한 감이 있다. 옥새는 기본적으로 '옥으로 만든 임금이 쓰는 도장' 이라는 '재질'에 관련된 이름이다. 옛날에는 옥새보다 '어보' 라는 말이 많이 쓰였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옥새를 전시하고 있는 덕수궁 안 궁중유물 전시관에는 '어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보는 일반적으로 옥새, 즉 임금의 인장을 말하나 왕비, 왕세자,빈 등의 인장도 포함된다. 어보는 옥으로 만든 것은 옥새,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라고 하였다, 옥새는 국새로 많이 대용하였으며 조선 영조 대에 가장 많은 어보를 새겨 용도에 따라 사용했다. 문서의 내용에 따라 각각 다른 어보가 사용됐다. 즉 옥새는 '어보'와 비슷한 넓은 의미로 쓰였다. 반면 최근 대표성을 갖고 쓰이고 있는 '국새'는 나라를 대표하는 인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옥새가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조시대에 중심으로 쓰였던 용어라면 국새는 현시대에 적절한 용어로 보인다.

[국새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언제일까?]
후한서와 사기에는 문헌상으로 국새에 관한 얘기가 처음 등장한다.
진시황이 화씨벽(초나라 화씨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캐낸 옥)을 입수해 그것으로 도장을 만든데서 유래했다. 임금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재질이 옥으로 된 까닭이었던 것. 진시황은 승상 이사를 시켜 이 도장에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이라는 글을 새겼다. 진시황과 관련해서는 이런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번은 진시황이 지방을 순찰하다 동정호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옥새를 호수에 던지니 물결이 잔잔해졌다. 8년 후 진시황이 화음 지방을 지날 때 한 노인이 길을 막고 서서 '용왕님께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옥새를 주고 사라졌다"는 것.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진시황의 손자 자영은 옥새를 한 고조에게 바쳤다. 한고조가 이 옥새를 차고 다니자 이를 '전국의 옥새'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옥새는 황제의 상징이 됐다.

[우리나라 국새]
국사에 사용하는 관인. 임금이나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국가의 표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예왕(穢王)이 예왕지인(穢王之印)이란 국새를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 고려 때는 요(遼)·금(金) 등이 임금에게 금인(金印)을 하사, 원나라에서는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 왔으며, 1370년(공민왕 19)에는 명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 왔다. 이조에 와서는 '위화도회군'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성립한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옥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옥새를 하사받아 일종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했던 것.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옥새는 중국으로부터 하사받는게 관행이 됐다. 조선 왕조는 이 옥새를 중국과의 외교문서 등에 사용하고 국내 문서 등에 사용됐던 옥새는 조선왕조가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옥새에 영물은(인장의 꼭지에 조각된 상징물)거북이다. 중국이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상징물에 들어있는 영물이 거북이다. 세종조에 들어와 한때 "우리 옥새를 만들자"는 얘기가 있기도 했었다.
조선왕조가 나름대로 만들어(옥새는 중국에서 내려준 것 외에도 용도에 따라 여러 중류가 제작돼 사용됐다.) 사용했던 옥새에 들어있는 거북이 모양을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도 눈에 띈다.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거북이가 머리를 치켜드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조선왕조가 주체성을 강조하는 시대일수록 거북의 머리가 올라갔다. 세종은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 성종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각각 만들어 썼다.
영조 때는 국새의 종류가 많이 생겨 대보(大寶:사대문서에 사용)·시명지보(교서·교지에 사용)·이덕보(以德寶:통신 문서에 사용)·유서지보(諭書之寶:유서에 사용)·과거지보(科擧之寶:시권에 사용)·선사지기(宣賜之記:서적 반포에 사용)·동문지보(同文之寶:서적 반포에 사용)·규장지보(奎章之寶:교지에 사용)·준명지보(濬明之寶:춘방·교지에 사용)·흠문지보(欽文之寶)·명덕지보(命德之寶)·광운지보(廣運之寶) 등을 사용하였으며, 고종은 그 전의 국새를 전부 폐지하고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대조선대군주지보(大朝鮮大君主之寶)·대군주보(大君主寶)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으며,"(옥새의) 거북이만보면 신물난다"며 상징물을 용으로 바꿨다. 대한국새(大韓國璽)·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대원수보(大元帥寶) 등을 만들어 썼다.
중국과 관계없이 우리 국새로는 처음으로 제대로 만든 것이 1897년 옥새다. 고종은 조선왕조가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며 용을 상징 물로 해 옥새를 만들었다.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5월 새로운 국새가 마련되었는데, 사방 두치(약 6㎝)의 정방형 인면(印面)엔 한자 전서(篆書)로 '大韓民國之璽' 라 전각하였다.1963년 1월에는 국새규정을 고쳐, 사방 7㎝의 정방형 인면(印面)엔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였다.1999년 2월 1일부터 민족의 자존과 문화적 자긍심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국새규정을 전면 개정하여 사방 10.1㎝의 정방형 인면에 훈민정음체로 "대한민국" 넉 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게 되었다.

[국새의 관리기관]
국가의 인장(印章) 제조에 대한 통제기록으로는 고려 18대 의종(毅宗)(1146∼1170) 때 "인부랑(印符郞)"이란 인부(印符)를 두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초기에 상서사(尙瑞司)가 설치되어 새보(璽寶)·부패(符牌)·절월(節鉞)을 전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총무처에서 관장하여 왔으며, 정부조직 개편으로 98년 2월 28일부터는 행정자치부 의정국 의정과에서 국새와 함께 대통령직인, 국무총리직인을 관리하고 있다.

[추진배경]
국새는 예로부터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나라의 사회적 배경·요구·사상에 바탕을 두고 제작되었다. 따라서 국새는 그 나라의 시대성과 국력, 문화를 반영한 상징물이었다.그러나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새는 1962년 말에 제작되어 37년간 중요 외교문서, 훈·포장증, 임명장 등에 매년 16,000여회 이상 사용되어 인면(印面)이 손상되었다.그뿐만 아니라 인문(印文)의 서체는 한자 전서체(篆書體)를 모방하여 한글의 독창성을 상실하였다는 학계의 지적을 받아 왔으며, 국새 손잡이(印紐)의 거북이 형태 조각은 과거 중국의 천자가 열후(例候)들에게 하사하던 국새의 형태로서, 역사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잔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국새의 재질은 옥(玉) 또는 금(金)으로 제작되던 과거의 전통을 무시하고 은(銀)으로 제작하여 국새의 품격을 낮췄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게다가 그 제작경위 또한 분명하지 않다는 지적 등 그 동안 국새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정부는 199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국가의 보물이자 예술품으로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수 있는 민족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켜, 대망의 2000년에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는 국민적 여망을 담아 새 국새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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